본문 바로가기
5급 공채 (행정고시)/2013년 인책형

[13행(인)-3940] 2013년 5급 공채 (행정고시) PSAT 상황판단 인책형 39-40번

by Topgemstone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5세기 후반 왕실의 도자기 수요량이 증가하자 국가가 도자기 제조를 직접 관리하게 되었다. 광주분원은 왕실에 필요한 도자기를 구워내기 위해 경기도 광주군에 설치한 관요(官窯)였다. 광주군 일대는 질 좋은 소나무 숲이 많았기 때문에 관요에 필요한 연료를 공급하는 시장절수처(柴場折受處)로 지정되었다.
  예로부터 백자가마에서는 숯이나 재가 남지 않고 충분한 열량을 낼 수 있는 소나무를 연료로 사용했다. 불티가 남지 않는 소나무는 백자 표면에 입힌 유약을 매끄럽게 해 질 좋은 백자를 굽는 데 최상의 연료였다. 철분이 많은 참나무 종류는 불티가 많이 생겨서 백자 표면에 붙고, 그 불티가 산화철로 변하여 유약을 바른 표면에 원하지 않는 자국을 내기 때문에 예열할 때 외에는 땔감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도자기를 굽는 데는 많은 땔감이 필요하였다. 한 가마에서 백자 1,500개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50짐의 소나무 장작이 필요했다. 장작 1() 56() 말하며 1태는 2짐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분원은 소나무 땔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하여 시장절수처 내의 수목이 무성한 곳을 찾아 약 10년에 한번 꼴로 그 장소를 이동하였다. 분원이 설치되어 땔감에 필요한 소나무를 다 채취한 곳은 소나무가 무성하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그 곳에 분원을 설치하여 수목을 채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질 좋은 소나무 확보가 중요했기 때문에 시장절수처로 지정된 곳의 소나무는 관요에 필요한 땔감으로만 사용을 하고 다른 관청의 사용을 전면 금지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번 분원이 설치되어 소나무를 채취한 곳은 화전으로 개간되었기 때문에 다시 그 곳에서 땔감을 공급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 말경에는 분원을 교통이 편리한 곳에 고정시켜 두고 땔감을 분원으로 운반하여 사용하자는 분원고정론(分院固定論)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논의는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하였고, 경종 원년(1721) 이후에야 분원을 고정시켜 시장절수처 이외의 장소에서 땔감을 구입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17세기 후반부터는 분원에 소속된 공장(工匠) 생계를 보조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사경영(私經營)을 허용하였고, 이것이 점차 늘어나 18세기에 들어와서는 상인자본이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에는 그 규모가 더욱 늘어 결국 고종 21(1884)에는 관요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위의 글에 근거하여 추론할 때 옳은 것은?

 

 시장절수처의 소나무는 질이 좋아서 관청의 건축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17세기에는 시장절수처의 소나무 숲 상태를 고려하여 분원이 이동되었을 것이다.

 19세기에 양반들은 광주분원의 공장에게서 도자기를 구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나무 확보가 어려워지자 분원을 고정하고 땔감을 구매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어, 17세기 말부터 분원이 고정되었을 것이다.

 광주군 일대는 질 좋은 소나무가 많아 19세기까지 광주분원은 정기적으로 순환하면서 시장절수처에서 땔감을 공급받았을 것이다.

 


 

광주분원 2,000가마에서 300만 개의 백자를 생산하는데 필요했던 장작의 양은? (단, 장작 1거는 5태로 계산한다)

 

 1,000

 1,500

 5,000

 7,500

 10,000

 

이 문제의 해설을 알고 싶다면?

↓ ↓ ↓ ↓ ↓

[5급 공채 (행정고시)/2013년 인책형] - [13행(인)-3940해] 2013년 5급 공채 (행정고시) PSAT 상황판단 인책형 39-40번 해설

 

[13행(인)-3940해] 2013년 5급 공채 (행정고시) PSAT 상황판단 인책형 39-40번 해설

※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5세기 후반 왕실의 도자기 수요량이 증가하자 국가가 도자기 제조를 직접 관리하게 되었다. 광주분원은 왕실에 필요한 도자기를 구워내기 위해 경기도 광

topgemstone.co.kr

 

반응형

댓글